스페인 마드리드 외곽, 구아다라마 산맥 자락에선 오늘도 염소 방울 소리가 맑게 울린다. 이곳에는 멸종 위기에 놓인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Cabra del Guadarrama)’라는 희귀 염소가 살고 있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이 염소는 대량 생산에선 한참 뒤처진다. 더 많은 우유를 짜낼 수 있는 외래종 염소들이 들어오면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하지만 최근 이 고집스러운 염소 덕분에 ‘지속 가능한 치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스페인 곳곳의 작은 치즈 공방들이 이 토종 염소들의 우유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연구는 마드리드 지역의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 치즈(CGC)를 포함해 안달루시아의 말라게냐 치즈(MC), 무르시아-그라나디나 치즈(MGC), 플로리다 치즈(FC)까지 총 4종의 토종 염소 치즈를 비교해봤다. 같은 염소라도 품종과 먹이, 목축 환경이 다르면 치즈 맛과 영양 성분이 어떻게 달라질까? 실험실은 물론, 미각 평가까지 꼼꼼히 따져본 결과는 꽤 흥미로웠다.
우유만 다르면 치즈도 달라진다
연구진은 스페인 곳곳의 전통 치즈 공방에서 원유 상태 그대로 만든 치즈들을 모았다.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 치즈는 마드리드 인근 산자락에서, 말라게냐 치즈는 170마리의 염소가 초지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안달루시아 농장에서, 무르시아-그라나디나 치즈는 무르시아 지방에서, 플로리다 치즈는 세비야 근교에서 만들어졌다. 모두 60일간 숙성된 단단한 치즈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치즈와는 비교가 안 된다.
성분부터 살펴보자. 지방 함량을 보면 CGC는 약 31%, MGC는 39%로 무려 8% 차이가 났다. 단백질도 CGC가 26%로 가장 높고 FC는 22%로 낮았다. 지방과 단백질 비율이 낮을수록 담백하고 건강한 맛이 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CGC와 MC는 지방/단백질 비율이 1.2~1.4로 낮은 편이었다.
소금은 어떨까? 염소 치즈는 특유의 짭짤한 맛으로 유명한데, CGC는 1.25%로 가장 낮았고 MGC는 1.87%로 가장 높았다. pH 수치도 차이가 났다. MGC는 pH 4.85로 가장 산성이었고, CGC와 MC는 5.3~5.4 수준으로 비교적 낮은 산도였다. 낮은 pH는 병원균 억제에 도움을 준다.
지방산 프로필로 본 건강 점수
염소 치즈의 매력은 풍미 못지않게 지방산 프로필에도 있다. 모든 치즈에서 포화지방산(SFA)이 가장 많았지만, CGC가 상대적으로 가장 낮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오메가-6와 오메가-3의 비율이다. 일반적인 서구식 식단에선 이 비율이 15:1 이상으로 높지만, CGC와 MC는 3.7 정도로 매우 낮았다. 이는 항염 효과가 높고 심혈관 건강에도 이롭다.
혈관 건강 지표인 동맥경화 지수(AI)와 혈전 생성 지수(TI)도 비교해봤다. MGC는 AI 3.0, TI 4.1로 가장 높았고, MC는 각각 2.6, 3.3으로 가장 낮았다. 즉, 말라게냐 치즈가 가장 ‘덜 나쁜 지방’을 가졌다는 의미다. CGC는 이 두 지수가 중간 정도였지만, 전체 지방 함량이 낮아 결과적으로 건강에는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부드러운가 단단한가, 맛으로 증명하다
실험실 데이터만으론 부족하다. 연구진은 숙련된 평가단과 일반 소비자 116명을 불러 직접 시식 평가를 했다. 블라인드로 맛을 본 결과, 대부분 치즈는 텍스처와 풍미가 조금씩 달랐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치즈가 어느 품종에서 왔는지 정보를 알려주자, 반응이 달라졌다.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 치즈는 ‘멸종 위기 토종 염소’라는 설명을 듣자 선호도가 높아졌다. 반면, 지방이 많아 건강 점수가 낮았던 MGC는 오히려 선호도가 떨어졌다. 결국 소비자들은 ‘맛과 식감’뿐 아니라 ‘어디서 왔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색과 질감도 달랐다. CGC는 수분 함량이 높아 부드러운 텍스처를 보였다. 반면 MGC는 지방과 단백질이 많아 더 단단한 치즈였다. 색은 흰빛에 가까운 CGC와 노란빛의 MC, FC가 확연히 구분됐다.
사라지지 않게 지켜야 할 맛
이번 연구는 단순한 치즈 맛 비교가 아니다. 토종 염소 품종이 사라지면 그 지역의 맛과 전통도 함께 사라진다.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 염소는 생산성이 낮아 경제성이 떨어지지만, 그 대신 혹독한 환경에 강하고 고유한 풍미를 가진 우유를 낸다. 대규모 산업화된 축산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가치다.
연구진은 “이런 치즈들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고, 지역 특산품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정보 제공만으로도 소비자 선호도가 달라졌듯이, 토종 품종의 가치를 스토리텔링으로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마트에서 ‘카브라 델 구아다라마 100% 원유’라고 적힌 치즈가 자랑스럽게 진열된다면, 우리는 멸종 위기의 염소를 지켜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셈이다. 한 입의 치즈가 잃어버린 자연과 전통을 지켜주는 맛이라니, 이보다 더 맛있는 이유가 또 있을까.
📌 출처 논문
Herrera, T.; Pérez-Baltar, A.; Ortiz, L.; Letón, P.; Miguel, E. Physico-Chemical, Microbiological and Sensory Characteristics of Cabra del Guadarrama Cheese and Other Cheeses from Different Spanish Autochthonous Goat Breeds. Foods 2025, 14, 2368. https://doi.org/10.3390/foods14132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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